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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장마
입맛이 없다. 먹는 거 가리지 않고 맛집 찾아 다니는 거 좋아하는 한국 간판 체고 출신 김요한에게는 비상사태인 것이었다. 최근 한달 사이에 몸무게가 삼 키로나 줄었다. 대충 커피 하나 사 들고 과 사무실 옆 게시판에 붙어 있는 인턴 모집 공고를 유심히 바라 봤다. <주식회사 JLD 인턴사원 모집. 사무보조. 기간 3개월. 학점 인정. 차비 지원. 급여 협의.> 김요한은 여느 대딩들과 똑같다. 평범하게 산다. 다만 체대 입시 준비를 한창 하던 초기에 발목에 큰 부상을 입어 급하게 진로를 전환하게 된 케이스라는 가슴 아픈 과거가 있었다. 요한이 인생 최초로 겪은 나락이었다. 한동안은 스스로 머리 속에 파 놓은 작은 웅덩이에 한껏 웅크리고 들어가 앉아 있었다. 세상이 무너지는 기분을 그때 처음 느꼈다. 평생 바라보던 목표가 사라져 버렸다는 상실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타고난 성격상 부모님이나 친구들 앞에서는 티 내지 않고 혼자 땅굴 파다가 예상 외로 커트라인 높은 인문 대학에 진학하게 되면서 서서히 어두운 동굴 속을 빠져 나왔다.
우여곡절 끝에 입학한 대학 생활은 어찌 되었든 즐거웠다. 전에 없던 자유를 만끽하며 다소 무모하게 시간을 보냈더니.. 어느덧 슬슬 취업을 염두 해야 하는 시기가 찾아 오게 된 것이다. 입맛이 없어진 타이밍과 정확히 일치했다. 김요한 원래는 과 사무실 앞 게시판 같은 거 거들떠도 안 봤었다. 지원자격도 꼼꼼하게 훑었다. 한번 해볼까? 괜찮을까? ..잘은 몰라도 지금 공고 붙어 있는 JLD 정도면 최근 경기 불황인 와중에도 잘나간다고 인터넷에 자주 뜨는 유명 스타트업 회사이기도 했고..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이렇게 출석만 하는 게 의미가 있나. 급격히 몰려오는 인생의 현타. 삼 분의 일 남은 커피를 원샷했다.
요한은 이래저래 많이 놀며 지낸 인간인 데에 비해 성적은 좋은 편이었다. 할 건 하는 타입이다. 지원자격은 충분하니 결심하고 신청만 하면 됐다. 결과가 어떻든 간에. 공고를 집중해서 읽기 시작했을 때부터 과 사무실 문에 노크를 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고작 십 분 남짓이었다.
"조교님 안녕하세요."
뒤늦게 온 공고라 지원자가 적다고 했다. 요한이 고개를 느리게 끄덕였다. 살 길 찾을 사람은 이미 다 찾았다는 거지. 다르게 생각 해보면 운이 좋은 편인 거다.
인턴으로써 처음 사무실에 출근 하게 된 날은 옷장 앞에서 뭘 어떻게 입어야 할지 한참 고민했다. 뭐 어차피 정식 사원도 아니고.. 단정하게만 입으면 되겠지. 셔츠 위에 니트를 겹쳐 입고 기합 넣자는 의미로 새로 산 가죽 크로스 백을 메고 집을 나섰다. 집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위치에 있는 사무실은 전체가 유리로 되어 있는 고급스러운 건물이었다. 모든 사회 초년생들이 다 그렇듯 떨리고 불안한 마음이 동시에 들었다. 나름 패기 있게 지원해 놓고 우수한 능력으로 합격까지 해놓고는 문득 드는 걱정들. 잘 할 수 있을까, 여기서 뭘 할 수 있을까 내가. 엘리베이터 앞에 선 요한이 가방 끈을 만지작거렸다.
"저기.."
"아, 안녕하세요."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눈에 보이는 사람 붙잡고 저기 한마디 했을 뿐인데 또래로 밖에 보이지 않는 예쁘장한 남자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 오늘부터 나오기로 하신 분이죠? ..요한씨? 이름까지 불러주고. 요한이 네네 맞습니다. 작게 대답했다. 김우석 입니다. 건네주는 명함을 받았다. <주식회사 JLD 해외무역 총괄 팀장 김우석.> 이쪽으로 오세요. 앞으로 저 많이 도와주실 거거든요. 자리도 저랑 가까우실 거고. 어, 일단은 인사부터 할게요. 역시.. 어른은 어른이다. 우석은 다년간 사회생활 해온 짬으로, 날씨 많이 쌀쌀해 졌죠? 내일은 비 온다고 하더라구요. 머쓱해 하는 요한을 데리고 능숙하게 대화를 주도했다.
부서별로 나누어진 자리를 느리게 돌며 어색하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김요한 입니다. 잘 부탁 드립니다. 인사 몇 마디 한 걸로 맥이 빠졌다. 낌새를 눈치 챈 우석이 소매 자락을 붙잡고 끌었다. 요한씨 자리는 여기! 깔끔하게 정돈 되어 있는 자리는 낮은 파티션 하나가 놓인 우석의 바로 옆이었다. 출근하면 여기로 와서 앉으면 돼요. 음, 일은 지금은 전체적으로만 간단히 설명 할게요. 그때그때 보면서 같이 또 이야기 해요. 요한이 간헐적으로 고개를 움직여 가며 가방을 의자 옆에 걸었다. 컴퓨터는 킬 수 있죠? 농담이라고 하는 거다. 요한이 픽 웃었다.
"요한씨."
"네."
"웃으니까 잘생겼네요."
"..."
이건 빈말 아니었다. 묵직한 진심이 느껴졌는지 요한도 마우스를 만지작거리던 손을 움찔했으니까. 그래 놓고는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아마 힘든 건 없을 텐데 이게, 시간이 걸리는 일이 많거든요.. 서두르지 않아도 되니까 꼼꼼하게 봐줬으면 좋겠어요. 끄덕끄덕. 하는 얼굴이 짐짓 경직 되어 있었다. 그래도.. 요한씨 잘 해주실 거 같아서 안심 돼요. 형식적으로 해준 말이라고 하든 뭐든 김요한은 밤새 뒤척였다.
"미치겠네.."
입술 세모 모양으로 모으고 웃던 얼굴이 자꾸 떠올라서.
첫날에는 이런저런 소개 하느라. 다음 날에는 미팅 룸에 나란히 앉아 앞으로 취급 할 서류들을 훑어 보느라 본격적인 업무는 삼일 뒤부터 시작됐다. 우석이 미리 말 했던 대로 어려운 업무를 처리해야 하는 건 아니었다. 다만 종일 모니터를 뚫어져라 보며 수만 개 되는 자료들 중 각 건에 대한 서류를 골라 취합해야 했다. 심지어 이번 주부터는 야근의 연속이었다. 요한씨 괜찮아요? 눈 아프죠. 이게.. 은근 힘들어. 쉬어 가면서 해요. 우석이 조심스레 커피를 내밀었다. 요한씨만 사주는 거니까 몰래 마시라는 깜찍한 말을 덧붙이며. 가장 구석에 있는 자리라 가능한 밀회였다. 네 감사합니다. 잘 마실 게요. 그래도 얼마간 일 했다고 취향 확실히 간파했다. 시럽 두 번 넣은 연한 아메리카노. 요한이 잠시 몸을 풀며 의자에 등을 기대며 늘어졌다. 우석도 빙그르르 의자를 돌려 앉았다.
"요한씨 오고 나서 계속 바쁘네. 미안해요."
"아니요. 일 열심히 해야죠."
"뭐 힘든 거 없어요?"
"..."
우석은 초지일관 다정했고 멀뚱멀뚱 시키는 거 다 잘 쳐내는 요한을 깍듯이 챙겼다. 요한씨 일 완전 잘 한다. 나는 처음에 이렇게 못 했어요. 능력이 있네.. 칭찬도 아끼지 않았고. 최저시급으로 겨우 측정되는 월급을 받는 김요한을 데리고 주변 유명한 식당을 돌며 꼬박꼬박 밥도 사주었다. 인턴사원이야 전담 팀장들이 챙겼으니 하던 대로 하는 중이었는데 솔직히 이제까지보다 각별하긴 했다. 그러니까 만약 요한이 오늘은 친구랑 먹을 게요. 하면 상처받을 것만 같은. 팀장님 근데 저만 계속 얻어만 먹어서 어떡하죠? 내일은 제가 사드릴게요.. 디저트로 요거트 스무디까지 손에 쥔 요한이 축 쳐진 표정으로 말했다.
"그럴래요?"
"네. 저도 돈 있거든요.. 팀장님처럼 비싼 건 못 사드리겠지만."
"좋아요. 나 거절 안 해요 이런 거."
다음날 점심 요한이 쏜 메뉴는 연어 덮밥이었다. 우석이 데려가 주지 않은 식당을 찾아 내느라 밤새 네이버와 인스타를 뒤져가며 잠을 설쳤다. (애석하게도 우석은 전에 요한이 아니라 다른 직원과 와본 적 있다고 했다.) 좀.. 아쉬웠지만 운 좋게도 웨이팅 없이 들어가 여유 있게 점심을 먹고 나서 따듯한 커피 한 잔씩 나눠 들었다.
"요한씨 있잖아. 다음주부터 더 바빠질 거 같아요."
"아. 네네."
"그래도 나는 요즘 요한씨랑 점심 먹으면서 힐링하니까 좋아요."
"..."
"나만 그런가?"
예쁘게 휘는 눈. 요한은 대답 하지 못하고 침만 꼴딱 삼켰다.
미리 예고했던 대로 무진장 바빴다. 야근의 연속이었다. 5일 중에 4일은 잔업을 해야 했다. 인턴도 원래 야근을 이렇게 무지막지하게 하나요? 하는 의문을 가질 법도 했는데. 이걸 단순히 일을 하는 게 아니라 우석과 같이 보내는 시간이라고 생각하니 그러려니 넘기게 됐다. 요한씨 우리 이번 일만 잘 끝내면 내가 크게 한턱 쏠게요. 쫌만 더 도와줘요.. 일이 많은 게 본인 탓도 아닌데 울상이 되어 말 하는 김우석을 미워할 수 있는 사람이 있기는 할까? 밉기는커녕 오히려 더 부려 먹어달라고 빌고 싶은 심정이었다.
가까워진 것도 맞고. 주말에도 빈번하게는 아니어도 연락을 주고 받게 된 것도 맞다. 점심 먹으러 나가는 게.. 어느새 데이트 하는 기분이었다. 허나 확실하게 호감을 가지게 된 계기를 설명하기에는 좀 애매한 면이 있었다. 의식조차 하지 않았었기 때문에 문득 깨닫고 나서야 뒤늦게 느꼈으니까. 서로 지금.. 무진장 신경 쓰고 있다는 거. 감정 보다 제법 규모 있는 회사의 팀장과 인턴 사원이라는 간극이 더 크게 와 닿았었기 때문이었다.
칼퇴 하기 아쉽고. 출근이 기다려지는 말도 안 되는 기분이 됐을 때 진작 알아 차렸어야 하거늘.
이주일 넘게 매달리던 이번 통관 관련 건을 무사히 끝내고. 별 탈 없이 해외로 수출이 나간 것을 확인한 날. 팀원들끼리 모여 술을 진탕 마셨다. 팀장이라고 술을 사원들한테 술을 얼마나 받아 먹었는지.. 것도 맥주 소주 비율 생각도 안 하고 막 섞어서. 초장부터 취기가 돌았다. 정해진 룰은 아니었지만 이제까지의 전통상으로 주식회사 JLD의 회식의 1차는 식사자리였는데도 불구하고. 다같이 술독으로 다이빙 했다. 덕분에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정신이 나간 우석은 도저히 2차는 가지 못하겠다고 부하직원들 두고 빠져 나왔으면서,
눈치 보다 몰래 빠져 나온 요한이 꼬시자마자 가까운 바로 둘이서만 2차 갔다.
택시 잡고 있는 우석을 붙잡은 것, 눈이 한껏 풀려 요한을 쫓아간 것 전부 강렬한 충동에 의한 행동이었다.
"요한씨.. 나한테 뭐 할 말 있어요?"
"..."
"갑자기 둘이서만 술 마시자구 해서 놀랐어.."
"그냥 그러고 싶었어요."
"..."
칵테일 한 잔씩 시켜 놓고 마주보고 앉아 한동안은 아무 대화도 오가지 않았다. 힘든 일은 없죠? 내가 잘 해주잖아. 평소의 우석이 유순하고 잔잔한 모습이었다면 지금은 어딘가 애교 있고 말투에 야릇함이 묻어 있었다. 나 원래 안 이러거드은.. 테이블에 마주 앉아 있는 사람들 치고는 얼굴이 가까웠다. 우석이 먼저 웃음을 터뜨리며 테이블 위로 늘어졌다 몸을 일으켰다. 요한씨.. 어디 살지? 우리 집이랑 머네. 요한씨가 나 데려다 줘야 하는 거 아니야..? 주절주절. 처음 보는 허트러진 모습이었다. 요한이 손을 뻗었다. 손등을 살살 쓸자 우석이 몸을 일으켜 눈을 마주했다. 붙어 지낸 시간이 길었던 만큼 불꽃은 빠르게 튀었다.
"걱정 마세요. 팀장님 제가 데려다 드릴게요."
"농담이야.. 요한씨도 취했잖아."
"아니요 저는 멀쩡해요."
"..."
"완전히 멀쩡하진 않은데."
오히려 다행이었다. 정신 또렷하지 않은 거. 간지럽게 닿은 손, 늘어지는 말꼬리, 아랫배 당기는 분위기. 요한이 손에 깍지를 끼웠다. 나갈까요? 물으니 바로 끄덕끄덕 순응한다. 비틀거리는 걸음. 요한이 팔을 단단히 붙잡고 지탱해주며 택시를 잡았다. 금요일 밤인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아직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새벽의 거리. 우석이 조심스럽게 어깨에다 머리를 기댔다. 아마도 같은 생각으로 가득 차 있을 둘의 머리 속이 열 기운으로 펄펄 끓었다. 예상은 요한이 조금 더 빨랐다. 처음 웃는 얼굴을 봤을 때부터 잠을 이루지 못하는 밤이 여러 번 있었으니까. 나 집 정리 안 했는데.. 어떡하지. 엘리베이터에 함께 올라 타면서 우석이 그랬다. 저 집 안까지 들어 가요? 김요한 일부러 떠봤다. 우석은 밀리거나 당황하지 않고 벽에 기대고 있던 몸을 뗐다. 요한의 앞으로 가 섰다. 단정하게 차려 입은 코트 안 쪽의 가디건 단추를 느리게 풀었다.
"요한씨 얼굴에 다 써있어."
"뭐라고 써있어요?"
"..."
"..."
"내 얼굴에 써있는 거랑 똑같이."
"아."
본능적으로 허리를 잡아 주는 김요한. 픽 웃었다. 다른 거 같은데요? 우석이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릴 때도 우석은 뒤로 걸어 내려야 했다. 아니면 팀장님이 잘 못 보셨거나. 우석이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는.. 좀 더럽고 엄하거든요 지금."
"..."
"..."
"나도 깨끗하진 않아."
집에 들어서자마자 입술을 집어 삼켰다. 온몸이 빨려 들어갈 것만 같은 묘한 감각에 등에 소름이 돋아 났다. 요한씨 우리 신발 좀 벗자.. 하면서도 몸을 가누지 못하길래 요한이 손수 허리를 숙여 벗겨 주었다. 몸을 번쩍 들어 올렸다. 다리를 허리에 감게 하고, 목덜미에 이를 콱 박았다. 내숭 떨었던 건지.. 집안은 깔끔하게 정돈 되어 있었다. 김요한은 마치 매일 집을 드나들던 사람처럼 익숙하게 침대를 찾아 우석을 다소 거칠게 눕혔다.
"이럴 줄 알았어요? 내가 팀장님이랑 이런 거 하고 싶어 할 거 같았어요?"
"..."
"..."
"대충은?"
"근데 왜 떨지?"
"좋아서.."
당최 이길 수가 없다. 허리를 들썩이며 웃는 얼굴을 내려다 보며 요한이 차근차근 옷을 벗겨 냈다. 침대 아래가 금새 너저분해 졌다.
지독한 술기운과 충동에 의한 행위였음에도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누구 하나 당황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김우석은 맨 팔을 베고 편하게 누워 있었고 김요한은 우석이 어디 도망 가는 것도 아닌데 뼈가 도드라지게 튀어 나온 어깨를 힘주어 감싸고 있었다. 꼬물거리다 눈이 맞았다. 여느 영화에서처럼 놀라 나자빠지거나 반사적으로 튕겨 나가는 게 아니라 그대로 푸스스 웃음을 터뜨렸다.
얘네 혹시 이미 만나기로 한 사이였었나? 싶을 정도로 아무렇지 않게.
"아 좀.. 춥다. 썰렁하네."
"팀장님 새벽에는 더워서 이불 안 덮겠다고 하시던데."
"아니.. 그때는 진짜 더웠어."
"이불 덮어 드릴까요?"
"웅."
먼저 체온을 나누고 나니까 다음 단계는 너무 자연스러웠다. 이렇다 할 고백이 말로 오가지는 않았어도 처음 밤이 너무도 강렬한 탓이었다. 본격적으로 연인이라고 정의해도 무방한 사이로 발전했다. 이전과 비교해 보면 똑같이 열심히 일 하다 말고 휴게실 가서 노닥거리는 날이 늘었다. 그러기 위해 업무를 처리하는 데에 속도가 붙었으니 착한 땡땡이로 인정 가능한 부분이었다. 휴게실에서 커피를 내려 마시고 별 의미도 없는 이야기를 주고 받는다. 원래 이런 사이는 다 그런다. 시시한 말에도 커다란 반응이 터진다. 이따금씩 씨씨티비 사각 지대에 앉아 대담하게 입을 맞추기도 했다. (설립 멤버라 사각지대 알아내는 것쯤이야 김우석 팀장님한테 아무것도 아니었다.) 가장 큰 변화는 호칭이었는데 공과 사의 구분은 확실했다. 낮에는 팀장님, 팀장님. 회사를 나서는 순간부터는 주로 형이라 불렀다. 그러다 가끔 우석아. 라고 말 깠다. 한참 어린 인턴 나부랭이가. 당연히 경우 없이 아무 때나 그러는 건 아니었고.. 이를 테면 침대 위에서. 우석이 봐줄 것 같을 때에 눈치 봐 가며.
(나름) 일과 사랑을 동시에 얻은 꿈 같은 날을 보내는 중이나 요한에게 주어진 시간에는 분명한 기한이 있었다.
머물던 현실로 돌아가야 하는 때가 가까워져 올수록 속에 지니고 있던 불안감은 크기를 키워 갔다. 복잡한 과정 없이 시작되어 설레었던 관계가 이제와 아슬아슬 위태롭게 느껴지는 거였다. 차라리 우리 오늘부터 1일인 거다 못이라도 박았으면 나았을 것을. 요한이 서류를 훑어 보며 안경을 치켜 쓰는 우석을 물끄러미 바라 보았다. 곧 볼 수 없는 옆모습이다. 도저히.. 생각을 읽을 수 없다. 쥐고 있던 펜으로 신경질 적으로 탁탁 책상 위를 쳤다. 우석이 고개를 돌렸다. 왜 뭐가 잘 안돼? 쓰고 있던 안경을 벗어 두고 요한에게로 가까이 다가선다. 어 아니요.. 아니야. 그냥. 책상 아래로 몰래 손을 만지작거리다 깍지를 끼워 잡았다. 뭐야. 김우석이 웃는다. 묻고 싶은 게 많았다. 형은 나를 어떻게 생각 해요? 매일 보다가 내가 사라지면 형은 어떨 거 같아? 형도 나만큼 불안해? 나처럼 진지해? 입을 뗄 수 없는 데에는 여러 이유들이 있다. 느닷없이 이런 걸 물으면.. 애처럼 볼 까봐. 혹은 저만큼 깊은 마음이 혹시 아닐 까봐. 저도 모르게 손에 힘이 들어 간다. 우석이 요한아 아파.. 작게 속삭이며 잡힌 손을 빼내었다.
여러모로 억울했다. 맨날 날짜를 확인해 가며 밤에 잠도 잘 못 자는데 우석에게서 오는 잘 자라는 메시지가. 태어나 처음으로 소화제를 챙겨 먹고 있는 제게 꼬박꼬박 밥 사주는 우석이. 예쁘게 웃는 얼굴과 질리지도 않는 옆모습, 새하얀 뺨이.
아슬아슬하게 관계의 줄타기 위에 서 있는 건 혼자만 인 것 같아서. 김우석은 아무렇지 않아 보여서.
점점 과열 되는 불안은 엇나간 행동과 말투로 나갔다. 애처럼 볼까 걱정은 해놓고 딱 그리 보이게 굴고 있었다. 그럼에도 우석은 짜증 한번 내지 않고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요한을 빤히 바라 보기만 했다.
"요한아. 뭐 안 좋은 일 있어?"
"왜?"
"그냥 요즘 표정도 별로 안 좋은 거 같고."
"그래 보여요?"
"응. 나 너한테 뭐 잘못한 거 있나?"
또 웃는다. 요한이 가장 사랑하는 얼굴이다. 김요한을 잠들지 못하게 했던 웃음이다. 아냐 피곤해서 그래. 나 갈게요 형 들어 가요. 역시 입을 떼지 못한 채로 돌아선다. 가서 연락 하라는 우석의 말이 허공을 맴돌다 흩어졌다. 오피스텔 건물 앞에 덩그러니 남겨진 우석은 한동안 멍하니 서있었다.
푹 꺼진 요한의 등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서서히 대화가 줄어드니 당연히 골은 깊어져 갔다. 우석에게도 슬슬 한계가 오고 있었다. 화가 난 게 있냐고 물어도 아니다. 그럼 뭐가 문제냐고 달래도 아무 문제 없다. 요한과 나누는 대화는 더 이상 대화가 아니었다. 이대로 보내기 아까운 불편한 시간들은 잘도 흘렀다. 잠시 붙잡아 고정해 두고 싶었다. 둘은 이제 휴게실에 가지 않았고 집에 드나들지도 않았으며 점심도 따로 먹었다. 요한은 대충 나가서 커피로 때웠고 우석은 사무실에 늘어져 있었다. 흔한 자존심 싸움 같은 게 아니라 지레 겁을 먹은 마음과 원인 모를 날에 조금씩 무너지기 시작한 마음이 충돌하는 거였다.
둘 다 서로가 불안했다.
우석이 모니터 옆에 둔 탁상 달력을 손가락으로 훑었다. 빨간 볼펜으로 표시해놓은 날이 성큼 다가와 있었다. 요한의 인턴으로써의 마지막 날을 딱 하루 앞둔 날 모든 사원이 퇴근하고 난 고요한 사무실에서 우석이 한번 더 설득했다. ..너 계속 나랑 말 안 할 거야? 옆자리에서 짐을 정리하던 요한이 분주하게 움직이던 손을 우뚝 멈추었다. 저랑 말 하기 싫은 거.. 팀장님 아니세요? 둘 중 하나만이라도 곧은 진심을 말했으면 됐을 텐데.
끝까지 충돌한다.
"그래 됐다.. 너랑 무슨 말을 해."
"..."
결국 같은 말을 했으면 넘어갔을 일이다.
형 좋아해요.
요한아 좋아해.
다사다난했던 인턴 생활이 유쾌하지 못하게 막을 내렸다.
그간 만나지 못했던 친구들 몰아서 만나느라 일주일까지는 시간이 빨리 갔다. 술 마시면서 생각 없이 노는 것처럼 보여도 실은 종일 우석이 떠올랐다. 사이가 급격하게 틀어지기 직전 억울했던 모습들이. 맨날 날짜를 확인해 가며 잠을 설치던 밤에 안정감을 주던 잘 자라는 인사가. 태어나 처음으로 소화제를 챙겨 먹고 있는 제게 꼬박꼬박 밥 사주며 꼭꼭 씹어 먹으라 말 해주던 우석이. 예쁘게 웃는 얼굴과 눈 앞에 아른거리는 옆모습, 새하얀 뺨이.
그래 됐다 너랑 무슨 말을 해. 차갑게 말 해놓고 돌아선 가늘게 떨리던 어깨가.
침대 위에 누워 몸을 뒤척이던 김요한은 새삼스럽게도 지금 처한 상황을 믿을 수가 없었다. 하나하나 되새김질 해보면 더 사람 미치게 했다. 인턴은 끝이 났어도.. 이토록 깊게 남은 애정이 흐지부지 갈무리 될 수는 없다. 요한이 몸을 벌떡 일으켰다. 충동이라면 또 충동이었다. 이렇게 됐는데 따질 게 남았나. 앞뒤 재지 않고 무작정 달려 나갔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우리가 어떤 사이가 되든. 까놓고 말은 해보고 싶었다. 조금 늦은 감이 있지만. 무엇보다 보고 싶은 게 가장 컸다. ..딱 하나의 마음만을 쥐고 나오느라 아무것도 들고 나온 게 없었다. 어떡해야 하나 갈등 때릴 시간에 달렸다. 다시 돌아가지 않고. 엄청 먼 거리는 아니었다. 비교 대상은 우석과 연락하지 않고 지낸 일주일간 둘 사이에 생긴 틈이었다.
당장은 눈에 뵈는 게 없어 점점 하늘이 흐려지는 것도 모르고 달렸다.
종일 뉴스에서 때리던 때늦은 장마전선이었다. 도착 하려면 아직 한참 뛰어야 했다. 숨이 턱 끝까지 차 오르고 가슴팍이 욱신거렸다. 하필 비도 내리기 시작했다. 물론 김요한은 개의치 않고 달렸다.
익숙한 낯선 건물 앞이었다. 하늘은 이제 완전 먹구름에 점령 당했다. 요한이 숨을 억지로 삼켜 냈다. 망설임 없이 건물 안으로 들어서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이제 버튼 두 개만 누르면.. 우석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주먹을 꽉 쥐었다. 연락도 없이 찾아 와도 우석이 집에 있다고 확신할 수 있는 건, 붙어 지내는 동안 요한이 파악한 우석의 생활 패턴이다.
"..요한아?"
"..."
예상을 벗어나지 않고 우석은 곧장 문을 열어 주었다. 잠시간은 마주한 채로 말이 없었다. 목이 콱 막혔다.
"어쩐.. 일이야?"
우석이 먼저 축축한 목소리를 겨우 냈고 그제야 요한이 두서 없는 마음을 쏟아냈다. 빗물에 다 젖은 처량한 꼴의 머리와 옷을 하고서는.
..불안했어요. 우리가.. 나만 형을 좋아한다고 생각 했어. 형은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게 진짜 아무렇지 않았던 게 아니라 오히려 날 믿어 줬던 건데 그죠. 그게 두려웠어. 중간중간 목이 메어 문장이 뚝뚝 끊겼다. 나 형이 나 애처럼 볼 까봐 그게 그렇게 싫었거든요. 근데 그러고 있었어.. 나는 계속. 그랬어.
요한이 머쓱하게 고개를 숙인 채로 머리를 긁적였다.
"인정하기 싫어서 왔어요."
우리가. 지금이.
전혀 정리 되지 않은 김요한의 진심이 텅 빈 옆자리를 넋 놓고 바라보는 일이 는 우석에게는 통했다.
"얘기 다 했어?"
"..."
"이제 나 말 한다?"
"어.."
"요한아."
"..."
"기다렸어. 보고 싶었어."
겨우 한마디였다. 간단 명료 했다. 나도 보고 싶었어. 어깨를 바짝 당겨 안았다. 김요한이 가득 몰고 온 애정전선. 그 속의 비가 우석에게도 스며 들었다. 바야흐로 뒤늦은 장마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