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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겨울 열대야카테고리 없음 2020. 4. 18. 18:36
늦겨울 열대야 옥탑 방의 겨울은 뜨겁다. 커다란 평상 하나 펼쳐 놓은 것만 보면 여타 옥탑 방과 다를 바 없어 보이지만 올해 서른 된 김우석의 보금자리는 다르다. 강남 바닥 고층 건물 위에 딸린 옥탑은 고급 오피스텔 못지 않은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당연히 월세도 장난 아니다. 그러면 굳이 왜 여기를 골랐는가 하면. 표면상의 그럴싸한 이유, 별과 밤의 낭만과 안락함 두 마리 토끼를 잡고 싶어서. 진짜 속마음. 오래 만나던 애인과 이별한 집에서 더는 혼자 지낼 수가 없어 서둘러 찾은 집이 여기라. 허나 애석하게도 옥상은 공용 공간이다. 낭만이고 뭐고 이 건물에 사는 누군가가 올라와서 빨래를 널거나 평상에 드러누워 있다 하더라도 김우석에게는 쫓아낼 권리가 없다. 계약서에 도장 찍고 나서 알았다. 이래서 입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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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장마카테고리 없음 2020. 4. 18. 18:34
가을 장마 입맛이 없다. 먹는 거 가리지 않고 맛집 찾아 다니는 거 좋아하는 한국 간판 체고 출신 김요한에게는 비상사태인 것이었다. 최근 한달 사이에 몸무게가 삼 키로나 줄었다. 대충 커피 하나 사 들고 과 사무실 옆 게시판에 붙어 있는 인턴 모집 공고를 유심히 바라 봤다. 김요한은 여느 대딩들과 똑같다. 평범하게 산다. 다만 체대 입시 준비를 한창 하던 초기에 발목에 큰 부상을 입어 급하게 진로를 전환하게 된 케이스라는 가슴 아픈 과거가 있었다. 요한이 인생 최초로 겪은 나락이었다. 한동안은 스스로 머리 속에 파 놓은 작은 웅덩이에 한껏 웅크리고 들어가 앉아 있었다. 세상이 무너지는 기분을 그때 처음 느꼈다. 평생 바라보던 목표가 사라져 버렸다는 상실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타고난 성격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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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 밤바람카테고리 없음 2020. 4. 18. 18:29
한여름 밤바람 새로 부임한 감독의 첫 관전 경기였던 H 리그가 끝이 났다. 한동안은 아무 간섭 받지 않고 편하게 쉴 수 있단 의미였다. 물론 김요한의 심기를 건드리는 기사는 엄청 쏟아질 거다. 시즌 마지막 경기가 있던 날 상대편 선수와 시비가 붙어 성질을 죽이지 못한 탓이다. 상대는 신장이 십 센티 가까이 큰 서양인 선수였다. 어릴 적 요한이 해외 유소년 팀에 있었을 때 같이 훈련 받던 선수다. 본인 실력 향상에 힘을 쓰는 대신 저보다 훨씬 뛰어난 실력을 가진 동양인 선수를 괴롭히는 데에 에너지 다 쏟아 부었던 인성 쓰레기인 새끼다.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발령이 아니었다면 아직 지옥 같았던 매일을 보내고 있었을 지도 몰랐다. 어린 김요한이 했던 가족들도 모르는 마음 고생. 이걸 아는 사람 세상에 딱 한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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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눈꽃카테고리 없음 2020. 4. 18. 18:21
봄 눈꽃 오로지 대학에 진학하는 것 만이 인생의 최종 목표이던 시절에는 아주 막연하게 대학생활에 대한 로망을 가지고 있었다. 원래 학업에만 열중하다 보면 이런저런 잡생각이 많아지기 마련이다. 김우석은 뛰어난 우등생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성적 바닥 치는 하위권에서 노는 애도 아니었다. 굳이 따져 보자면 딱 중간인 가장 애매한 위치에 있었다. 조금만 더 노력하면 상위권을 노려볼 수도 있는. 확고하게 가진 꿈이 없었기에 부모님이 원하는 대로 일단 공부에 매진하는 성실한 고딩이다. 열 아홉의 숙명. 강제 야자다. 인간의 집중력에는 한계가 있다. 어둑해질 무렵까지 계속 되는 모든 수업이 끝나고 나서도 귀가할 수 없다. 석식 먹고 바로 야자 실로 들어가야 했다. 오후 11시까지 숨막히는 정적 속에 갇혀 있다 보면 ..